행복이란 불행이 없는 것이다.
불행이란 괴로움이다.
괴로움이란 내가 괴롭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늘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거울 수는 없다.
그것은 기분이다.
의사고시를 준비하는 1년.
거의 집밖에 나가지도 않고
일이 있으면 나가고
장보러 일주일에 한번 나가서 물건을 왕창 사왔다.
하루 8시간만 공부했다.
아침 8~9시부터 저녁까지 5~6시까지.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공부만 했고
중간에 점심을 먹었을 뿐이다.
내 부족함을 채울 수 있었고
시험공부라는 압박을
공부의 재미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은 내 생각의 차이라는 것이다.
의사고시를 통과하고
즐거움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의사고시 결과가 나온 날
처음으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의료봉사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는데,
의사고시 결과가 그 날 새벽에 나온 것이다.
의료봉사를 갔는데 뭐 이제 난 의사야~ 라는 마음도 없었다.
아니 최소한의 자신감은 있었다.
의료봉사를 하는데
내가 이들을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는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더 많았다.
내 지식으로는 맞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지는 의심이 들었다.
아... 면허증만으로는 의사가 될 수 없었다.
의료봉사는 계속 했다.
석사과정을 밟기로 마음 먹고 지도교수님을 찾았다.
학부시절 나에게 환자를 맡기고 치료하라고 했던 교수님을 찾아갔다.
그 교수님은 은퇴가 코앞이라 학생을 받지 못했다.
내가 석사를 하는 동안 그 교수님은 은퇴하기 때문이다.
교수님도 나를 받고 싶어하셨으나, 행정적으로 불가능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되는 일 하나도 없네~~ 라고 생각했고
정말 땅이 꺼진 듯 발바닥에 아무 느낌이 없이 공중부양 중인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팽건중 선생님을 만났다.
어? 교수님에게 석사를 하겠다고 했다.
'行~(된다)"
한글자로 끝났다.
그 이후로 아직 석사 입학 전인데
선생님 옆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쉬는 날도 없고
나도 쉬는 날이 없다.
하루 쉬는데 그날은 수업을 하셨다.
그렇게 선생님께 배우며 쉬는 날 없었지만
의료봉사는 계속했다.
주말마다 북경의 양로원으로
또는 한달에 한번씩 요녕성으로 의료봉사를 갔다.
의료봉사를 하면서 처음의 나는
매우 초조하고 내 치료나 처방이 잘못되었을까 고민했으나
그들은 다시 갔을 때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즐거움이 있었고
다시 한달, 학교로, 병원으로 돌아와 있으면
여전히 빡센 하루하루를 보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임상도 가야하고.
그나마 1학년때는 수업이 있어서 임상을 많이 못나갔지만
2학년 때부터는 수업이 없다.
오로지 임상.
그리고 졸업 논문 준비.
논문 주제를 찾는 것도 어렵지만
이걸 해볼까 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논문을 설계해서 결론 도출까지 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너무 어려워도 안된다.
몇번 주제를 정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사암침법의 원문이 내게 있음을 알았다.
수많은 책 속에 나에게 원문 일부가 있었구나.
우선 원문 작업부터 했다.
중국에는 사암침법 책이 없으니 원문이 없다.
비교적 완전한 원문을 찾아야 했고
한국의 김달호 교수님께 원문을 받을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원문이지만
교정하고 오류가 없도록 손보는데 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원문만 정리하는데.
그러면서 이미 책은 읽을만큼 읽었긴에 내용은 거의 다 아는 내용.
논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할까. 구상하고
써내려가고
7~8페이지 정도 써놓으면
뭔가 맘에 안들고 그 다음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반복했는데
나중에는 참고문헌이 없어도 7~8페이지는 그냥 쓸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보고 7~8페이지를 중국어로 써내려가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하지만, 논문의 형식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이론과 시대를 엮으려고 하니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에는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맞고
분류하여 다시 엮어내는 것이 낫다.
여러가지를 한번에 풀어낼 수록
읽는 사람이 복잡하게 느낄 수 있다.
최대한 단순하고 명료해야 한다.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논문은 쓰기 시작한지 4개월만에 완성되었다.
고칠 것은 중국어 문법 또는 표현의 문제만 조금 고치고 통과되었다.
50페이지가 넘는 논문에서
고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의 중국어는 약간 괴상했다.
논문에서 많이 본 문어적인 표현과 일상의 구어적인 어울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할까?
완전히 문장체도 아니고, 구어체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
논문이 끝나고 석사 학위도 통과되었고... 졸업식을 기다리기 전에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나보고 "졸업의별毕业之星" 을 신청하라는 것이다.
그게 뭔데?
그냥 영예 같은 거야.
그걸 왜 해?
하기 싫으면 말고..
근데 왜 내가 신청해야돼? (학교에서 알아서 주는거 아냐?)
여태 한번도 외국인이 받은 적이 없어.
외국인 학생 중에 니가 제일 유력해.
신청해야 하고
신청받은 학생들 중에 투표도 하고 선별도 하고
심사도 하고 면접까지 한단다.
와씨~~~ 이런거였으면 안하는건데..
이미 신청서를 냈다.
대부분 신청성에서 탈락한단다.
정말 한달 반동안 온갖 서류를 작성해서 내야 하고
졸업을 앞둔 상태라 한가하게 놀고 싶었는데...
투표도 하고 심사 받고
앞에 나가서 교수님들께 프레젠테이션까지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사실 안되도 괜찮다는 것이다.
해본 것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을 것 같다.
마지막 심사 및 프레젠테이션 전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 여기 나온 사람들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였다.
공산당원이고, 그동안 어떤 논문을 발표했으며.. 어떤 활동을 해왔고...
누구는 해외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누구는 SCI 몇 편, 우수 논문 몇 편...
거의 다 학술적인 분위기였다.
내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은
두 명의 사진을 붙여놓은 사진 한장이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손으로 쓴 원고 1장.
기억하기론
"내가 여기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우수한 연구논문을 내거나 학술회에 참석하거나 하지 않았다. 공산당원도 아니고, 단지 유학생 반장으로 활동했으나,
아마도 의료봉사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여기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보이는 사진은 내가 의료봉사를 하면서 치료했던 두명의 할아버지이다.
한 분은 돌아가셨고, 다른 한분은 아마도 살아계실 것이다.
한 분은 처음에 진료했을 때 간질 발작로 넘어져 머리 외부로 큰 출혈이 두번 있었고, 정신을 잃고 있었고, 파리가 몸 주변을 날아다녔다. 치료 후에 그 분은 정신을 차리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느날 부축하여 한번 일어나 앉을 수 있었고, 나에게 하늘에 간다는 식의 손짓을 해주었다. 그로부터 한달 후 돌아가셨다.
한 분은 담낭육종으로 온몸이 검은 황달을 앓고 있었으며, 음식은 하나도 먹지 못하고, 분유가루만 한숟갈 먹을 수 있고, 2달째 누워만 있었다. 치료 한 후에 그 분은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고, 다음에 간 의료봉사에서 진료하고 있는 내 앞에 오셔서 무릎을 꿇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셨던 분이다.
....
앞으로 내가 중국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의사로서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
그냥 내 이야기를 조금 떨며 주절주절하고 끝마쳤다.
이전 발표자들에게는 별다른 질문이 없이 끝냈는데
나에겐 여러 질문을 하셨다.
중국에서 살거냐? 중국에서 일할거냐? 병원은 찾았냐?
결국 그 많은 지원자 중에 20명만 추려졌다.
나는 졸업의 별 지명자 상을 받았다.
졸업의 별 수상자 10명은 모두 박사학위였다.
그리고 나는 석사였기에 그 외 10명으로 지명자 상을 받았다.
수상식 때 유일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인터뷰도 했다.
그 인터뷰 할 거라고 해서 대답할 말도 준비해놓으라고 했다.
"내 청춘은 여기에 다 썼다. 중국에 와서
팽건중 선생님과 장군 선생님을 만나서 배웠으며
그분들은 나를 부모처럼 아껴주셨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고, 중의학을 사랑하고,
중국의 미녀를 사랑하고... ㅡ.ㅡ;
내 청춘은 여기에 모두 바쳤지만,
앞으로 중국에서 살아가며 의사로 일하는 것이 바로 청춘이 아니겠는가.. " 뭐 이런 말을 준비해서 말했다.
난 "다 했다~~" 생각했는데
사회자가 다른 돌발 질문을 또 했다. ㅡ.ㅡ;
(멍~~ 엉??? 끝난거 아니였어? 얘 모야? 애드립이야??)
전혀 기억이 안난다. 무슨 말이었는지.
맨 앞줄에 앉아서 구경하기도 했고.
가빈이라 써있는 표도 가슴에 걸고 있었다.
졸업식을 할 때까진 내가 뭔 상을 받았는지 모르는 일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졸업식을 하러 나온
학생들 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검은색 학부생.. 약 500명.
파란색 석사생... 약 4000명.
붉은색 박사생.. 약 20명. ㅡ.ㅡ;
와씨... 4000명 중에 10명이었네? 라는 생각은 잠시 했다.
왜 그리 치열하게 신청서를 내고 심사를 하고 투표도 하고 뭐 하고...
그런거였구나.
우리학교에 석사가 4000명이 넘는다니.
그래서 조금 으쓱하긴 했다.
이때까지는 무슨 결과가 나오는 종점이 있었으나
지금은 종점이 없다.
하루하루 환자를 보며 살아갈 뿐이다.
환자 하나하나가 나에겐 시험문제 하나 푸는 것과 같다.
풀어본 문제는 쉽게 풀고
풀어보지 못한 문제도 운이 좋게 풀고
아는 문제도 틀리는
그런 상황이다.
모르는 문제는 다시 공부해야 하는데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만큼만 공부할 뿐
그 분야 모두를 공부하진 않는다.
그것도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임상을 하다보면 모르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
그렇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시험문제가 아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가끔 옛날에 풀었던 정말 어려운 문제들도 있었는데? 라는 생각도 하지만
환자에겐 모두 고통이고 질병이고 차별이 없다.
문제 하나 풀듯이 환자가 나으면 그냥 씨익~ 웃고 끝난다.
간혹 환자가 치켜세워주면 으쓱~ 당연하지~ 하는 정도이다.
돌아보면
행복은 무엇을 통과하는데 있지 않았다.
석사가 되고 졸업의 별이 되고 뭐가 되고
이런 것에 있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오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것이지
어느 포인트에 이르러야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비트> 의 정우성이 오토바이 위에서 하던 말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소실점.
소실점.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아무리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소실점 같은 것이고
멀리서 찾으려 밖으로 나가면 찾을 수 없는
바로 내 옆에 있는 파랑새 같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저 멀리로 향할 때
내 스스로를 자각하여 발밑을 내려본다.
내 마음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오길.
지금 그 발걸음 위에 행복이 있으니.
'외노자의 사생활 > 관찰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튜브를 하면서 좋은 점, 취미생활 (1) | 2024.08.07 |
---|---|
경국지색(倾国之色) (0) | 2024.03.22 |
왜 의료파업을 유도했을까? (0) | 2024.03.10 |
대만인 변호사가 보는 한국의 의료파업 (0) | 2024.03.09 |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 (0) | 2024.02.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