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의 사생활/관찰일기

사람 옆에는 사람이 있다

박쌤 ParkSam 2025. 4. 1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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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혼자이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만

혼자가 아니다.

 

누구나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

서로 손내밀지 않고

대화하지 않을 뿐이다.

 

또는 같이 살고 있지만

서로 말이 안통하고

서로 손내밀지도 않을 뿐이다.

 

같이 살고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고

같이 살지 않아도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작은 말 한마디가 소통이 되고

내 마음이 건너갈 수 있고

그 마음이 내게 올 수 있다.

 

몸이 같이 있다고 꼭 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음이 통하기를 바란다.

 

몸이 같이 있어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 수 있고

몸이 같이 있지 않아도 마음은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통할 수는 없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소통이 아니다.

그대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비로소 소통이다.

 

양방향으로 통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으라고 하는 것은 강요이고 소통이 아니다.

 

강요를 하면

상대가 해줄 수 없으면 죄책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강요이다.

 

부탁은 죄책감이 없다.

해줄 수 없는 부탁이니까.

 

강요는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지

상대는 말은 아직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요구를 말하려거든

상대의 요구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내가 옳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외롭다.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외롭다.

꼰대가 된다.

 

길을 간다.

운전을 한다.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길은 절대로 사고가 난다.

양보가 없으면

길에서는 사고가 빈번하다.

왜.

나는 이 길로 가야하니까.

당신이 잘못했으니까.

 

사고를 내지 않는 것은

양보하는 사람이고 마음이다.

 

내가 가는 신호가 옳더라도

브레이크를 밟아서 양보해야만 사고가 나지 않는다.

 

나는 신호 받아서 가더라도

저 새끼가 잘못했더라도

그것은 법원에 가서 따질 일이다.

사고가 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 새끼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면 나도 다치고 손해를 본다.

법이 어쩌구 저쩌구,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미 나는 손해를 본다.

 

다들 자기 갈 길 가느라 달리지만

사실 그 사람을 살려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양보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이 스스로 대단해보이겠지만

주변에서는 저 미친 놈을 피해야겠다 싶을 수도 있다.

 

요즘 요리조리 빠져나가다가

스스로 발에 걸려넘어지는

빽 씨를 보고 있다.

대략 6~7년 전부터 친구와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야 결과가 드러난다.

 

짧게 보면 쑉쑉 빠져나가서 잘 달려나가 신났겠지만

길게 보면

결국 빈틈 투성이 구멍송송의

하루아침에 무너질 성을 쌓고 있던 것이다.

 

최고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떠받치던

부서지는 저 아래를 보게 된다.

 

아득하다.

 

거대한 모래성이 부서지는 것 같다.

 

차라리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행인데

사실을 알아차려버리면

 

허풍은

소용이 없다.

그것은 결국엔

알게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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